먼저 가시오 – 먼 집에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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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David Bai 작성일 25-06-25 08:34 조회 18 댓글 0본문
해질 무렵, 조지아 외곽의 한적한 마당 끝, 핑크빛 벚꽃나무 가지에 참새 두어 마리가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. 바람은 애틀랜타 외곽의 나지막한 언덕과 가로수길을 지나와 이 오래된 집의 처마 밑으로 스며들었다.
집 안에서는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. 싸움이라기엔 정이 느껴졌고, 장난이라기엔 목소리에 숨결이 얹혀 있었다.
“당신이 먼저 가요. 그래야 내가 장례 치르지.” “내가 왜 먼저 가! 아직도 운전할 힘은 남았다고.” “그럼 내가 먼저 가면, 누가 내 생일엔 한국식 미역국 끓여줄 건데요?” “에이... 그건 또 그렇네.”
말끝을 흐리던 영감은 고개를 돌려 소파 옆 사진 액자를 바라보았다. 거기엔 이민 초기, 코트 깃을 세운 채 눈 내리는 뉴욕 거리에서 찍은 젊은 부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.
한참을 말없이 있다가, 쿡— 웃음을 터뜨렸다. “그럼 우리, 나란히 갈까. 장례도, 제사도 없이. 그냥 둘이서.”
그 말에 할멈은 소리 내 웃었고, 두 노인의 목소리는 이내 뒷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까지 번져갔다. 부부싸움 같았던 말들은 실은, 떠나온 고향을 서로 닮아가는 과정에서 쌓인 긴 세월의 다정한 농담이었다.
그들이 마지막으로 한국을 다녀온 지는 벌써 15년이 넘었지만, 마루 위에는 여전히 종이장처럼 얇아진 햇살 속에 흑백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. 웃고 있는 젊은 시절의 두 사람. 아마 오늘 이 장면을 본다면—그때의 그들도, 미국 땅 한복판에서 여전히 서로를 챙기는 자신들을 보며 웃었으리라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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